I. 머리말
딩이(丁乙, 1962- )는 중국 동시대 추상회화의 선구자이자,1 중국 85신사조 미술운동(85 New Wave movement, 약칭: 85 신사조)의 구성원으로2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추상 화가이다.3 그는 지난 30여 년간 ‘十’ 자 및그 변형인 ‘X’ 자를 주요 기호로 한 추상 작업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십시(十示)’라는 시리즈 명에 제작연도를 더해 <십시 2007-10>과 같은 제목으로 불린다.4딩이의 화면에 시종 등장하는 ‘十’ 자는 그가 20대 초반 공장에서 포장디자이너로 근무하며 자주 접한 인쇄물 사이즈를 표기하는 기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十’ 자 기호는 어떠한 문화적 지향성도 미적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제한 복제 가능하고 끝없이 파생될 수 있다고 여겼다. 딩이는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十’ 자를 자신의 작업이념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한 부호로 채택하였다.5

중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초 유럽·일본 등지로 유학을 통해 서구 현대미술 사상과 형식을 받아들여 추상회화를 실험한 일군의 작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중일전쟁(中日戰爭)6·국공내전7 등 혼란을 겪으며 추상회화의 발전은 정 체되었고, 특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공산당의 정치노선에 따라 문예방침에 있어 사회주의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를 표방하며 더 이상 공식적으로모더니즘 미술실험을 전개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8 이후 1978년 덩샤오핑(邓小平, 1904-1997)에 의해 추진된 개혁·개방 정책으로 창작 활동에서의 제약이 완화되며,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추상미술이 다시금 꽃을 피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딩이는 당시 중국 미술계의 다소 과열된 서구 현대미술에 대한 맹목적이고 급진적인 수용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며, 냉정하고 이성적인 자세로 자신만의 창작 노선을 모색했다. 그 결과, 딩이는 본인에게 있어 어떠한 지향성도 지니지 않은 ‘十’ 자 기호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기법을 확립하였다.9 그는 ‘十’자 기호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과 언어를 고안하여,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차원적인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딩이가 지난 30여 년 동안 ‘十’ 자 기호를 중심으로 전개해온 창작 과정과 변화에 대해 살펴본다. 그의 작업은 작가의 경험과 시점의 변화에 의해‘평시 단계(1980-1998)’·‘부감 단계(1999-2012)’·‘앙시 단계(2013-현재)’의 세 시기 나눌 수 있다.10 평시 단계에서는 기계적인 정확도를 위해 자와 같은 도구를 활용하여 형식적인 정밀함이 돋보이는 ‘十’ 자 추상회화를 선보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중국의 빠른 도시화로 인해 생겨난 도시의 변화에 대한 작가 고유의 시각을 표현하였다. 도시의 네온사인을 연상케 하는 자극적인 색감을 사용하여 고층 빌딩 위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야경과 변형된 도시의 지형도를 추상적인 언어로 담아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간 고수해온 평면 회화의 형식을 벗어나 목판화 기법과회화를 결합한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 ‘十’ 자 기호의 윤곽선이 모호해졌으며, 색의 명도와 채도를 낮춰 과도한 시각적 자극을 피하고자 했다. 작품의 주제에도 변화가 나타나는데, 도시화를 포함한 사회현상에 대한 반성을 넘어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류 보편적인 문제에 주목한다.